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브라운--
사랑이 의미하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이 점점 추잡해져만 가고 있는 현실에서 사랑의 명언을 곱씹다는 게 많이 망설여지는 요즘이었다.
사랑의 종교라는 것들 마저 부와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모습들이 스팸 메일 등을 통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한참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원초적이랄 수 있는 이성에의 사랑 마저 포기하고 살다보니 왠지 어색하기만 했는데,
저 글을 보면서 나의 사랑철학도 정리하고.단 한 사람에게라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으며,
특히 사회초년생인 나의 두 딸들이 겪을 혼란에 얼마간의 예방주사를 맞혀 주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
한가하기만 한 날을 골라 잡아 주절거려 보련다.
어제, 한 달에 한 번 있는 토요일의 나들이를 해서 ,한 젊은 교수로부터 들은 강의 내용이 '이별과 상실'에 대해서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강의를 하고 있는 그와의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혼자가 되는 이별과 상실의 위기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하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
SNS를 통해 인문학과의 만남의 자리를 알게 되곤 주제도 뭣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등록을 했던 것인데...
한 달에 한 번의 강의를 듣기 위해 가게문을 닫고,허름한 배낭 하나 둘러메고 전철여행을 해서 서울의 낯선 곳을 찾았다가...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 속 작은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어제도 무작정 갔던 것인데 받아든 프린트의 제목이 '이별과 상실'이었다.
이별과 상실로 겪게 되는 트라우마의 정의와 그 극복과정 등을 살펴보며
'마담 프루스트'나 '그랑블루', .레인 오버미'등의 철학적 사유를 담은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슬라보예 지젝의 ,인문학적 혼돈의 늪에 빠진 현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살짝 간만 보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까지 짚어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허무주의의 극복을 과제로 제시했다는 니체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한 ,'낙타-사자-어린이'로 비유되는 의미를,
해야 하는 강제적 의무감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가다 ,진정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자각의 과정이라고 설명해준다.
최근 조로아스터교를 검색하다 알게 된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긴 하루이기도 했으니 ,
온갖 거짓말과 사기가 행세를 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정체성을 느끼고 혼돈스러워 하였는데,
한 달에 한 번의 이 서울 나들이는 나의 숨통을 조금씩 틔워주고 있어서 기쁘다.
다음 번엔 지젝의 철학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서라도 한 권 추천받아 와야 할까보다.
SBS-CNBC에서 계속 보여주고 있는 인문학 강연에서 그의 강연을 보다가 ,하도 킁킁대서, 답답해서 꺼버렸던 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난 말을 하면서 군소리를 달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다.에~또~하는 식의 군소리는 나의 인내를 바닥나게 한다.
그래서 놓치는 게 아주 많은 나인데,지젝의 강연은 재방송이라도 하는지 살폈다가 꼭 한 번 보고 말리라.
최근 사랑을 섹스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받는 것으로 호도하며 외모 등을 무기로 상대의 기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빨아먹으려는 행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다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갈라서 버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사랑(?) 수렵꾼들도 늘어만 가고 있다.
나 역시도 사랑을 철저한 주고 받기로 정의하고 1대1 거래를 할 때 지속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정도의 사람이었다.
딸들에의 마음은 저 말처럼 주고 또 줘도 더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는데,전처와의 사이의 사랑은 주고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딸들의 어머니이자,너무 어려서 헤어진 어머니의 분신이라고도 생각했기에 1대1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대1,3대1은 주고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
그녀의 사랑이 더 필요하면 나 자신을 더욱 많이 혹사를 시켜서라도 주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집착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버림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하지 않고 알아서 기라는 강요를 하며 그것 하나도 못하는 주제라고 비난을 들어야 했다는 게 억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 이상은 이성간의 에로스엔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 않기로 결심하게까지 된 것이다.
하지만 딸들을 향한 마음이나,측은지심을 느끼게 해 준 갑으로 착한 아저씨의 경우엔 무조건적으로 주고 또 주고 싶다.
아직은 마음 뿐으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미미하기만 하지만 ,사랑의 진정한 의미쯤에 대해서 알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런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수양하고 실천하기를 그치지 말아야지...
혹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며 항의를 하고 있는지?
눈에 콩깍지가 씌인 직후처럼 영원불멸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처음처럼 끝까지 나를 배려하고 칭송하라고 주장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자신은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 위의 말처럼 사랑을 하려면 ,사랑 자체가 상대적인 것인 만치 피차가 함께 해야만 한다.
받기만 하거나 주기만 하는 사랑은 결국 처절한 배신감만을 안기고 깨지고 말 것이다.
육체적 사랑의 한 형태인 섹스를 주제로 성담론을 이끌면서도 일관해 온 주장이,남자는...여자는...식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에게 해주며 ,이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라고,그래야 피차가 만족할 수 있는 황홀경을 맛보게 되리라고 강조를 해왔다.
자존심은 연인 사이를 망치는 극약과도 같은 것이니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강조를 해 왔다.
섹스에 있어서도 잘못된 사랑의 모순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데,
보통 문외한인 상태에서 생각하기를 섹스는 남자가 여자를 만족시켜주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여자의 오르가즘은 철저히 남자의 몫이자 책임이어서 여자가 만족스런 성생활을 향유하지 못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다고 주장을 하곤 한다.
남자는 사정만 하면 만족을 하는 존재이니 어떻게든 만족을 하는 남자들이면서 파트너를 오르가즘으로 이끌지 못하는 남자는 성폭력범이다라는 식이다.
여자는 수동적으로 남자가 이끄는대로 맡기고 그가 선사하는 오르가즘을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성생활을 주제로 공개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자연시 된 현대에 와서도 그런 사람들이 적잖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진정 아름다운 성은 서로가 상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지 않던가?
얼른 사정해버리고 편히 쉬고 싶지만 상대를 좀 더 만족시켜주기 위해 참으며 상대가 원하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 줄 때 비로소 여성은 만족을 하게 된다.
그걸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한국의 남성들은 크기 자랑을 하고 횟수 자랑을 하며 성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여자도 상대인 남자가 나의 오르가즘을 보고 황홀해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고 ,
잘 안 되면 거짓 교성이라도 질러가며 상대를 만족시켜주려 애를 쓸 때 비로소 상대인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성감은 상대가 아무리 기를 써도 스스로 느끼려 마음먹지 않으면 안 께어나는 속성(?)이 있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느끼려는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진정 성감이 깨어나게 되고,비로소 본인도 상대도 만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켜주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비로소 만족스런 성관계가 완성되는 것처럼,
사랑도 서로를 배려하고 감싸주려는 노력을 아낌없이 상대에게 기울일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섹스도 엄연히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닌가 말이다.
섹스는 다르고 사랑은 또 다른 것이란 생각을 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엔, 모든 존재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순리란 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에의 사랑이 그렇고 연인과의 사랑이 그러하며,육체적 사랑행위가 그렇다.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나무 한 그루가 아닌 숲 전체의 모습이 있는데,나무 한 그루.아니 그 나무의 가지 한 자락을 붙들고 그게 다라고 고집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개인적 관계는 이렇지만 정치는 그것과 다른 무엇이 확실히 있다고 주장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 그렇고,
개인간의 거래는 이렇지만 거시적 경제적 관념에선 이렇다며 이율배반적인 이론을 펼쳐대는 경제학 운운하는 잡소리가 그렇다.
개인간의 관계에서 당연시 되는 것은 전체에 있어서도 당연시 돼야 하건만 ,규모가 커지면 달라질 수 있다며 궤변을 펼쳐댄다.
그러다보니 개인간에 당연시 되던 도덕 등의 원칙이 가치를 상실하면서 가치관의 혼돈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빚어지는 허무주의,좌표상실의 상태가 빚어지고,사람들은 그걸 감추려 성공제일주의자들이 되어 부와 명성의 종들이 돼 간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떨어져만 가면서 삶의 의미를 잃게 되고 만다.
자포자기를 하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주체적 자아를 싼값에 팔아넘기곤 엉뚱한 잡스런 우상들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면서 점점 무기력해져만 가고,멍한 상태에서 우울증적 증상을 보이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싸움을 하려고만 한다.
이런 현대적 증상을 간파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게 지젝적 철학이 아닐까 싶어서 관심을 갖고 싶어하게 된 것인데...
죽어도 놓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버리고,저만치 떨어져서 숲을 관조하는 식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자아성찰이 거기 곁들여진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주도하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