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삶,그 불확실성 속에서 단지 확실성에 반응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그런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전략의 목적이다.
--로드 존 브라운--
로드 존 브라운(1800~1859) 미국.노예 해방론자.(존 브라운과 로드 존 브라운이 동일인인지는 불확실함)
코네티컷주에서 작은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강성 노예 해방주의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노예 해방 운동에 투신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부친이 운영하는 공장이 노예들의 탈출로였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51년,미국 길레아드 동맹이라는 탈주 노예들이 주축인 비밀결사를 만들어,
1856년 노예제를 옹호하는 다섯 명의 백인을 살해하는 포토와토미 학살 사건을 일으킨다.
그 후 1859년 남부의 깊은 산에 해방노예의 나라를 세우고 노예 해방의 전진기지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무기조달을 위해 버지니아주 정부군 무기고를 습격,점령하지만,
곧 출동한 연방군대와 민병대와의 교전 끝에 패하고 ,그 해 12월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4개월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그는 노예해방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북군의 우상이 되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John Brown's body'라는 군가가 만들어졌다.
숭고한 목적의 노예 해방이란 행위를 했지만,지나치게 과격한 테러리스트 활동을 한 것에 대해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엔하위키 미러)
불확실성으로 인한 혼돈의 시대라며 ,그러니 수용하고 함께 혼돈을 부추기며 사는 게 순리라고 생각들을 하는 걸까?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려는 ,확실성에의 모색이나 추구보다는 ,오히려 이런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지도자연 하는 무리들이 그렇고,세계의 부와 권력을 장악하다시피 한 유대인들이 제2의 바벨탑을 건설하는 듯한 행태를 취하는 게 그렇다.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그들은 이젠 그것이 최선이라고 스스로도 믿게까지 돼가고 있으니...
거짓말,사기,폭력을 앞세워 그런 혼돈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고,억압하고 ,죽이기까지 하고 있다.
그들에게 세뇌를 당한 대부분의 민중들은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저들의 만행에 굴복을 하고 마는 편안한 길을 걷고자 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지젝이나 한국의 도올 김 용옥 등이 그들에 저항해 확실한 길을 내보이며 집중하자고 외쳐대지만 겁부터 내고 거부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따라 불확실성에 투쟁하며 목이 터져라고 피를 토하듯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골방에 앉아선 그들의 편이 되어 언제든 나서서 동참할 듯 분개를 해대지만,정작 골방을 벗어나면 깨갱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양심의 외침을 비난하며 부와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다.
그리고 잘못된 불확실성의 혼돈을 조장하는 무리에 끼어들지 못해 안달을 하며 아부하기에 바쁘다.
불의의 종이 되어 호의호식을 하느니 차라리 정의의 편에 서서 목숨을 내걸고 소.돼지처럼 살겠다는 식의 ,
과거 순국열사들의 애국애족혼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안면을 바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앞으로 누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될지를 궁금해 하는 민중들의 호기심이, 언론의, 점쟁이들을 동원한 온갖 잡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스스로 주도하여 권력의 중심을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구멍을 점쳐서 빌붙을 준비를 하고 싶어 한다.
말세가 되면 미신이 판을 치게 된다지 않던가?
점쟁이들이,철학관이란 간판을 걸고, 미래를 알려준다며 길거리는 물론이고 주택가까지 파고들어 혹세무민하는 데 여념이 없다.
카드점을 봐주겠다며 젊은이들의 거리에 나앉아 젊은 영혼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꼬드겨대고 있다.
나는 믿지는 않지만,남들이 가는 데 따라가서 재미로 점을 봤노라는 식으로 너나할 것 없이 미래를 알고 싶어하며 미신을 활성화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것들이 언론을 통해 민중들에게 너도 가서 봐라며 뱀의 혀를 낼름거리고들 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데리고 다니며 운명론자들을 만드는 데 정신을 못차리고 자빠졌다.
그리곤 팔짱을 끼고 눈 앞의 확실성에 집중하는 데 소홀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물질로,권력으로,미신으로 민중들의 혼을 온통 빼내버리고 말겠다는 이런 사회 분위기는 참으로 우려스럽기만 하다.
취업 면접의 장에 관상가까지 동원하는 기업들이 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심지어는 이름이나 외모를 바꿔가면서까지 운명의 종이 되고 말겠다는 이런 분위기는 성형외과 천국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순리에 따르지 않고 그 순리를 거스르고야 말겠다며 광란을 하고 있다.
이런 소리를 하는 나같은 사람을 꼰대라며 ,구린내 나는 구시대적 퇴물취급을 해버리며 광란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민중들이 참으로 측은하다.
알려줄 수는 있으나 강요를 할 수는 없는 것,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렇게 미쳐 날뛴 건 본인이 했건만,반드시 따르고야 마는 부작용의 책임은 주변으로 돌리고 말며 멱살을 잡고 싸우자고 대든다.헐~
즤들이 사치향락을 즐기느라 빚을 져놓곤 ,나라더러 책임을 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면 그런 혼란을 즐기는 지도자연 하는 사기꾼들은 그러마며 거짓 약속을 하곤 권력을 쟁취해서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댄다.
빈익빈부익부의 악순환은 끊일 줄 모르고 빈부격차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광란하고 있다.
불행과의 전장에서 싸울 생각은 않고 술에, 마약에 취해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정도로 해롱해롱대고 있는 형국이다.
똘똘뭉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싸워도 이길지 말지 장담할 수 없는데,적전분열을 해대고 있으며 행복이 불행을 이기길 바란다.
불행이란 적은 손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행복들을 물리치며 콧방귀를 뀌어대고 있는 형국이다.
과거,현재,미래를 두고 얼마나 많은 선현들이 가르침을 줬는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인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고 의미가 있을 뿐인데,대부분의 민중들은 현재만이 의미가 없을 뿐,과거나 미래 모두 중요하다고 난리다.
과거가 불행했으니 현재도 불행할 수 밖에 없다며 여전히 과거의 행태를 저지르며 미래 마저 불행하고 만들고 있다.
그리곤 미래를 담보로 빚을 내가며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데,이내 과거가 되고 마는 현재...
돌이킬 수도 없고 후회를 해봐도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이내 후회할 일들을 하느라 현재를 허비하고들 잇다.
행복과 불행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당장 나서서 적과 싸우는 것 뿐이다.
다리가 부러졌고 팔이 부러졌더라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불행이란 적들을 쳐부숴야 한다.
다리가 부러졌고 팔이 부러졌으니 몸뚱이와 머리까지 망가뜨려야 한다며 자해를 하는 것은 결코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가?
행복해지고 싶어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데도 내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이,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뭘까를 살피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고정관념,비교,경쟁,위선,사치,부정부패,거짓말,사기,협박,폭력...등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런 모든 적들은 하나같이 내 안에 있다.
불행의 씨앗은 밖에 있지 않고 모두 다 내 안에 있다.
내버려야 한다,고착된 것은 깎아내고 갈아내야 한다,길길이 뛰며 광란하는 대신 길길이 뛰며 떨쳐내야 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것을 미신이나 사치 향락 등 불확실한 방법으로 떨쳐버리려는 어리석음일랑 이제 그만 범하고 ,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내가 해야할 일을 하면서 집중을 해보면 거짓말 같이 불안도 두려움도 사라져버린다는 걸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조금씩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생기고 뿌듯한 보람까지 보너스로 챙길 수 있게 된다.
빚을 져서라도 집을 갖고 차를 굴리면 당장은 편한 것 같지만 벌어서 갚는 데 바쁘다보면 허기가 진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집도 차도 안 사고 빌려서 살고 걸어다니며 열심히 일을 하면 월급날 받은 돈이 고스란히 수중에 남게 된다.
저금통장이 카드사로 은행으로 월급이 빠져나가는 통로역할만 하는 것과 달리
한 푼 두 푼 쌓이면서 점차 잔고가 올라가는 희망의 텃밭이 되면 사는 게 즐거워진다.행복해진다.삶의 의미도 찾아보게 된다.
내가 줄곧 "분수껏 살자!"고 외쳐대는 이유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욕심이다.
우리가 키워가야 할 것은 희망이다.
분수껏 살아가면 욕심은 버리게 되고 희망은 점점 키워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키운 희망은 어지간한 평지풍파쯤에도 끄덕하지 않고 버텨준다.
나는 오늘도 욕심은 버리고 희망은 키우며 살아가는 것으로 현재를 알차게 소비하고 있다.
이처럼 확실한 삶의,행복의 비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