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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신문화진흥과 국정교과서
박 원 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일 하나와 맞닥뜨렸다. 우리 학교가 배우는 영어 교과서와 이웃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교과서가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학교 교과서 이름은 ‘게이트웨이(Gateway)’였는데, 이웃학교는 ‘탐앤쥬디(Tom and Judy)’였고, 얼마 더 지나 안 사실이지만 또 다른 학교의 교과서는 ‘유니온(Union English)’이었다. 세상에! 우리가 배우는 영어와 쟤네들이 배우는 영어가 다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럼 영어가 여러 가지라는 것인가(영국식 영어니 미국식 영어니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당연히 걱정이 뒤따랐다. 만약 학력경시대회나 고등학교 입시에 우리 교과서에는 없고 저쪽 교과서에만 있는 내용이 나온다면?

‘정답은 하나’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요즘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접할 때면 떠오르는 유년의 기억 한 토막이다. ‘모든 것의 정답은 하나다’라는 묵시적인 고정관념에 뿌리를 둔 판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돌이켜 보면 삶은 단답형이고 정답은 항상 주어져 왔다는, 그즈음의 나이로서는 당연히 품었음직한 통찰(?)이 그 강고한 고정관념의 뿌리였던 듯하다. 물론 성적이 나쁜 것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이지 교과서가 다른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절감한 것도 이 문제를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데 한몫을 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리는 실업 영역 선택과목으로 상업을 배우는데 저쪽 학교는 공업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기우가 다시 한 번 도지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 대부분의 논쟁이 그렇듯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역시 예의 진보 대 보수의 논리에 따라 뚜렷이 편이 갈리는 양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영논리를 잠시 괄호 쳐놓고 바라본다면 단일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이른바 ‘올바른 역사’라고 규정하는 태도는 근본적인 측면에 있어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인 측면이란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역사학의 고전적인 물음에 대한 입장을 가리킨다.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아마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보는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일 것이다. 그러나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이 견해는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투성이다.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설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연결하는 작업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는 그대로’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란 통상 ‘사료(史料)’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역사 기술의 원천인 이 ‘사료’는 출발점에서부터 주관에 물들어 있다. 모든 기록은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장소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특정한 삶의 조건 속에 살던 특정한 기록자가 남긴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날것 그대로의 기록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설령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하게 기록자의 주관이라는 필터에 걸러진 상태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정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 논의와 밀접하게 관계에 있는 단군신화가 똑같이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서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배제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선택되고 있는 상황이 잘 말해준다.

다양한 해석의 성찬으로 비판과 성찰이 가능케

  두 번째 문제는 날것 그대로의 사실을 담고 있는 사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역사는 아니라는 점과 연관된다. 사실의 나열이 역사는 아니다. 사실들을 엮어 그것들이 놓여있는 시대적 맥락을 드러내주는 것이 역사이다. 1950년 6월 25일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를 해석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쪽도 그날의 사건에 대한 이른바 ‘좌편향’된 교과서들의 해석을 문제삼는 것이지, 전쟁발발이라는 사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사료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역사인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모든 ‘해석’ 즉 ‘사실을 엮는’ 작업은 어디까지나 객관이 아니라 주관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본질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밖에 없다. 역사해석의 주체인 ‘주관’은 당연히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는 동시대를 사는 다양한 주관들이 각자가 선택한 ‘사실’이라는 재료로 요리한 음식을 선보이는 ‘쿡방’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80년 광주’라는 재료는 ‘사태’, ‘의거’, ‘폭동’, ‘운동’, ‘항쟁’ 등 다양한 이름의 음식으로 조리되어 시청자에게 선을 보인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우리의 미각은 한층 풍성해진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은 시청자들에게 이 음식들 중 하나만 ‘올바른 음식’으로 규정하고 그것만 먹을 것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비록 천하일미라 하더라도 한 가지 음식에만 길들게 하는 것보다 미각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식생활 자체의 질을 높인다는 점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태도이다. 백보천보 양보하여 설령 그것이 ‘올바른 음식’이라 하더라도 단언컨대 시청자들은 이내 질리고 말 것이며, 그에 따라 다시 새로운 음식을 찾아 나설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학이 인문학의 주빈으로 대접받는 것은 이처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미각을 일깨워 삶 자체를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속에 퇴적되어 있는 지나간 삶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성찬을 제공함으로써 비판과 성찰이라는 인문학의 본령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데 그 인문학을 모태로 하는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는 정부가 다른 교과서도 아닌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기도라도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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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원재

·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중국철학

·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예문서원, 2001
〈철학, 죽음을 말하다〉 산해, 2004 (공저)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공저)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 (공저)

· 역서
〈중국철학사1〉간디서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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