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수기Ⅰ- 감방 안에 꽃피는 겨레의 얼
날이 갈수록 학생 피검자의 수가 격증하여 감방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이 됐고 급기야는 무덕전까지를
임시 감방으로 쓰게 되었다. 고문의 수법도 가지가지였다.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혹은 장작개비를 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무릎을 꿇고 앉게 한 다음
위에서 구두발로 짓밟기도 했고 , 손톱 밑을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다.
또 배가 터지도록 물을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도 하였으며
두팔을 뒤로 묶어 천정에 매다는 소위 비행기 고문도 당했다.
그 중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옷을 활짝 벗겨 알몸으로 날바닥에 눕게 하고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맨 다음 물을 끼얹어
몸에 전기가 잘 통하게 해 놓고 밧데리의 전류를 몸에 연결시키면 그 고통은 실로 참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고문을 당하고 몸을 끌며 감방으로 돌아오는 동지들의 창백한 얼굴을 볼 때 우리들의 어린 가슴은
찢어질 듯 괴로웠다. 어쩌면 인간이란 허울을 쓰고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이것이 모두 나라 없는 우리 겨레의 비극이 아닌가. 차마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생지옥이었다.
밖에서 시위학생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들리면 우리도 감방 안에서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를 간수에게 들키면 끌려나가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 되어도
우리 학생들의 의기(義氣)는 저상(沮喪)할 줄을 몰랐다.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이들 고문당한 학생들이 초죽음이 되어 들어오면
감방재소 학생들은 서로 나서서 상처를 주물러 주고 어루만지며 육친형제 이상의 동지애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구속 2주일 만에 나는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한밤중에 흡사 명태처럼 한 수갑에 두 사람씩 채우고 이를 한 줄에 꾀어 끌고 다녔다.
형무소로 이감된 즉시 우리는 푸른 수의를 갈아 입고 미결수 번호를 가슴에 붙인 다음 감방으로 밀려 들어갔다.
각 감방에는 먼저 들어온 학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때 상급생들이
자기네들은 서서 밤을 새우면서 어린 나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고 편히 잠자게 보살펴 주었다.
날씨가 추우면 입은 옷도 벗어 덮어주고 나를 감싸 안고 체온으로 녹여주기도 했다.
회고해 보면 이때 상급생들의 후배들에 대한 온정은 순수한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감방 고참들은 신참자들을 위안해주고 검사에게 조사받는 요령도 일러주었다.
- (박준채, 『신동아』1969년 9월호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학생충돌" 중에서 발췌)
- 옥중수기Ⅱ- 어깨총 수갑차고 중금병방(重禁屛房)으로
두 사람은 징벌로 독방에 처박히게 되었다. 주당석은 4사 독방이었다. 유치오는 3사 16호 독방이었다.
징벌받는 방인만큼 둘 다 독방 중에서도 특히 견디기 어려운 방에 배정되었다. 7월이 되자 독방은 숨이 턱턱 막혔고
피부병이 심해졌다. 환부에서는 진물이 나고 퉁퉁부어서 보행마저 불편하게 되었다.
참다 못한 유치오가 간수장을 면회하고 전방해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간수장은 빈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고토(五藤)라는 일본인 간수가 불쑥 나타나 시비곡절을 따질 사이도 없이 유치오의 멱살을 추켜잡고
현관 밖으로 끌고 나갔다. 현관 밖 오른쪽에는 널찍한 콘크리트 바닥이 있었다.
그 곳까지 유치오를 끌고 간 고토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유치오를 수 차례의 어깨치기로 연거푸 때려눕혔다.
고토는 유도 5단이었다. 유치오는 처음에는 비명도 질러 봤지만 곧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숨을 간신히 깔딱거리며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편지를 쓰고 있던 동지들은 심상치 않은 비명 소리에 놀라 와르르 현관 쪽으로 몰려나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들은 치를 떨었다.
“이 인간 백정놈들아!” 유달리 목청 높은 김민환이 형무소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유치오가 간수에게 맞아서 뻗어 버렸다!” 거구인 주당석이 감방 동지들을 향해 연방 외쳤다. “동지들아 유치오가 맞아 죽었다.” |
나머지 동지들도 목청이 터져라고 울부짖었다.
각 감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5개 사전 감방으로 퍼졌다.
우리에 갇힌 젊은 사자들이 포효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 때가 오전 11시 반쯤 되었을 것이다.
8월 1일의 일이니 7월 7일 밤의 대투쟁이 있은 후 한 달도 못 된 때였다.
오후 2시경에는 경찰서에 병력 동원을 요청하여 형무소 외곽을 경비하도록 하였다.
형무소 간부 회의에서 적극 진압책을 쓰기로 결정함에 따라 오후 2시부터 이른바 진압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수십 명의 간수가 일제히 각 감방문을 열어젖히고 학생 피고들을 가혹한 형벌로 짓눌렀다.
어깨총 수갑을 채우고 정의복(靜依服)으로 가슴팍을 조여매기도 하였다.
정의복이란 가죽 조끼 같은 것인데, 일단 물에 축축하게 축인 다음 가슴팍을 조여매어 두면, 물기가 마르면서
가죽이 오므라들어 갈비뼈가 우그러질 정도였으므로 호흡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감방 안으로 반의식 불명인 채 끌려온 유치오는 한참 후에 깨어나 아픈 것도 모르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감방 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4, 5명의 간수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쳐들어와 다짜고짜 유치오의 손을
비틀어 올려 어깨총 수갑을 채워 버렸다.
다음 순간, 유치오가 수갑을 채우고 쾌재의 웃음을 짓고 있는 고토 간수의 아랫배 쪽을 있는 힘을 다해 발길로 걷어찼다.
고토는 '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마룻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남근과 불알을 차인 것이다.
유치오는 보기 좋게 원한을 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나머지 간수들이 미친 개처럼 덤벼들어 주먹질, 발길질을 퍼붓고 유치오의 가슴팍에 정의복을 둘러매고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가죽 띠로 입을 틀어 막고는 중금병방(重禁屛房)에 가두었다.
중금병방이란, 간단히 말해서 깜깜한 먹방이다. 창문도 전등불도 없으며 빛을 완전히 차단한 방이다.
유치오는 어깨총 수갑을 차고 정의복으로 가슴팍을 조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이 칠흑의 방에 처넣어진 것이다.
- (최성원,『신동아』 1980년 6월호 "광주학생운동 옥중투쟁기" 중에서 발췌)
고문도구1 : 어깨총수갑, 가죽조끼, 가죽띠
일제 형리들은 수감 학생들이 항거할 때면 가죽 마스크로 입을 막고 , 손을 등 뒤로 해서 수갑을 채우고
물기가 마르면 조여드는 가죽조끼를 입히고 , 빛이 완전히 차단된 방에 가두는 등 포악무도한 폭행을 자행했다.
고문도구2 : 장작개비, 고추가루물, 송곳
학생들이 수감되어 있던 일제시대 광주형무소
일제 경찰은 이곳에서 어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취조하면서 폭언.구타.전기고문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제시대 대구형무소
성진회와 독서회 관련으로 검거된 학생들은 1930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송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 애국심을 가진 분들이 친일 찬미자 보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잘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함께 나라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수구꼴통의 지지로 집권하는 정부 보다 더 나은 나라로 건전하게 발전시켜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뜻에 부합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애국심이 가득한 진실의 소리를 소개합니다
[영상] 공정성장을 위한 공정3법 토론회입니다. 30분정도 강연으로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안철수 의원님 강의 출처 = . youtu.be/i_Uio1cgHl0
이런 고통들이 오늘날 나라를 찾고 민주주의를 만들어 낸 것들일텐데...
현 정치는 이게 뭔가요......다시 공포스런 민주주의속에서 기득권자들의 행패를 바라보고있는 꼴 아닌가?!
정말이지~~
정치인을 잘 뽑아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다...제발 기득권자들의 놀이에 속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