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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 내가 그렸다” 위작 주장 권춘식씨의 고백

“고인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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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위작 시비’에 오른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 (우) 고 천경자 화백.
‘비가 오면 슬퍼지도록 감각이 약동한다. 살아오는 동안 죽도록 일만 해온 습성 때문인지 내 신경은 잠시도 나를 무심상태로 놓아주질 않고 쉬지도 놀지도 못하는 불행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 나는 오직 꿈을 파먹고 살아왔다. 지나온 길이 평탄하지 않아 눈이나 비, 꽃과 친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에서 얻어지는 고독한 행복감에 젖어 오직 작업하는 일만이 편한 길이었다.’
   
   지난 8월 미국 뉴욕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진 천경자 화백(1924~2015)이 1995년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에 남긴 글이다.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화백의 예술은 한국 화단의 혁명이었다. 그는 1952년 수십 마리 뱀이 우글거리는 작품 ‘생태’로 세상에 천재화가의 등장을 알렸다.
   
   여배우처럼 화려했지만 고독을 팔자처럼 안고 살았던 천경자 화백은 고인이 돼서도 편치 않은 상황이다. 사후처리 문제를 놓고 2남2녀(막내아들 김종우씨는 사망) 중 맏딸 이혜선씨와 나머지 형제들 간 갈등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천경자 화백에게 가장 큰 상처였던 ‘미인도’ 위작 문제를 생전에 풀지 못하고 간 것이다. 별세 소식과 함께 미인도를 둘러싼 진실게임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미인도를 둘러싼 진실게임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고 며칠 후 주간조선은 “내가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위작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권춘식(68)씨와 연결이 됐다. 권씨가 먼저 주간조선에 ‘양심고백’의 뜻을 전해왔다. 지난 10월 27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다음날 권씨의 홍은동 자택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다. 권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천경자 화백의 위작을 모두 4점 그렸다. 지인의 부탁으로 달력 그림을 조합해서 3점을 그려줬고, 관훈동의 B화랑 주인이 부탁해서 한 점을 별도로 그려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것이 맞다.”
   
   권씨는 고서화 위조 등으로 1995년, 1999년 두 차례 구속된 적이 있다. 당시 두 차례 모두 검찰 조사에서 권씨는 ‘미인도’와 관련해 같은 주장을 하면서 파문이 일었지만 구속된 상태에서 진술의 진위를 제대로 확인받을 기회도 없이 유야무야 묻히고 말았다. 권씨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나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천경자 화백께서 절필 선언까지 하면서 지금까지 마음의 짐으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사건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죠. 나도 충격을 받았어요.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어요.”
   
   한국 화단에서 최대 위작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미인도’ 논란은 희대의 미스터리이다. 작가가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내 작품이 아니다”고 주장을 하는데도 미술관 측은 “진짜”라고 맞선 것이다.
   
   문제의 미인도는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소장품으로 정부가 압류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측에 이관한 작품이다. 당시 전문위원이었던 오광수씨가 진품이라고 판단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미술관 측이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기획전시를 하면서 이 작품을 전시하고 아트포스터로 만들어 팔았다. 지인을 통해 포스터를 보고 노발대발한 천 화백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화랑협회는 3차에 걸친 감정을 통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 작품도 몰라보는 작가’가 된 천 화백은 “붓을 들기 두렵다”며 절필을 선언하고, 결국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으로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위작 논란은 세상에서 잊혀질 만하면 다시 불거져 나왔다.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사람은 바로 권씨였다. 권씨는 위작 사건으로 여러 차례 검찰 신세를 졌다. 1995년 위조사건으로 구속돼 수사를 받던 권씨는 검찰에 ‘천 화백의 위작’ 이야기를 꺼내 한 차례 파문이 일었다. 1999년 또다시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작품을 위조한 혐의로 구속된 권씨는 이때도 자신이 천경자 화백의 위작범임을 밝혀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두 번에 걸친 권씨의 주장은 ‘영웅심리로 천경자의 위작범을 자처한 거짓말쟁이’로 끝나고 만다. 권씨가 미인도를 그린 시기를 1984년이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 근거였다.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된 때가 1980년이니 시기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1999년 권씨의 발언에 대해 오광수 당시 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7월 8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으로 미인도는 틀림없는 진품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에 그 정도 색채를 사용할 만한 작가는 천경자씨밖에 없다. 천씨의 작품을 위작할 실력이면 천재적인 작가가 될 수 있다. 권씨에게 미인도 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하면 의문은 금방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권씨가 미인도를 그릴 수 있느냐는 의문은 2011년 11월 3일자 조선일보 지면을 보면 풀린다. ‘4억 진품과 20만원 위작, 맞혀보세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송향선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위원장이 자료용으로 가지고 있던 천경자 작품의 위작을 공개했는데, 그 위작을 그린 사람이 바로 권씨였다. 노란 화관을 쓴 검은 머리의 여인을 그린 작품은 명암 등 디테일이 차이가 났지만 언뜻 보면 구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지난 10월 28일 자택에서 두 번째로 만난 권씨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문제의 미인도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그린 것이 틀림없이 맞다”면서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했다.
   
   “노란 꽃을 그린 것이 내 스타일 맞아요. 이게 따라 그리기가 쉬워요. 내 그림은 자세히 보면 천경자 스타일과는 달라요. 볼 옆에 음영을 넣은 것도 딱딱하고 머리를 처리한 것도 단순하잖아요. 머리에 갈귀 같은 것도 어색하고, 꽃도 딱딱하고. 나비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 선집’(금성출판사)에 나온 천경자 여사의 다른 작품에서 따서 그린 거예요. 입술 밑 콧망울 가운데 음영 넣은 것도 생각이 나네요.… 내가 그린 것 맞아요. 눈동자도 천 여사는 금분을 많이 써서 노란데 나는 그냥 물감을 썼어요. 시기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관훈동에 있는 B화랑 부탁을 받고 그려줬어요. 그 양반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청전 이상범 그림도 선물용이라면서 부탁하고 저한테 일을 자주 맡겼어요. 이 작품은 40만원인가 50만원인가, 50만원 받은 것 같아요.”
   
   권씨는 문제의 미인도를 그리기 이전에도 비슷한 작품을 3점 더 그렸다고 한다. 달력 그림을 보고 조합해 만든 3점은 이름만 대면 아는 인사동의 유명 화랑에서 전시에 나왔다가 천경자 화백이 “위작이다”고 항의를 해 문제가 됐다고 한다.
   
   “1995년 구속돼 조사받을 때 한 기자가 관련 기사가 난 신문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그린 위작 3점이 그대로 실려 있었어요. 근데 화랑 대표가 워낙 힘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냥 넘어가더라고요. 또 B화랑의 부탁으로 두 폭짜리 가리개 작품에서 가운데 접힌 부분을 수정해서 한 장짜리 큰 작품으로 만들어준 것이 생각이 나요. 금붕어라는 작품인데 나중에 천경자 여사가 보고 ‘나는 그렇게 큰 작품을 그린 적이 없다’고 했다더라고요.”
   
   권씨는 미인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비밀은 ‘석채(石彩)’라고 말했다. “천 여사는 작품에 악센트를 넣듯이 부분적으로 석채를 써요. 질이 좋은 걸로. 일본에서 사다 쓴 것 같아요.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만지면 돌가루 느낌이 나서 거칠거칠해. 내가 그린 그림은 분채(汾彩) 물감이에요. 가루를 아교에 풀어 쓰는 거라 만지면 느낌이 안 나요. 부드럽죠. 그래서 진품과 위품을 쉽게 구별할 수 있어요.” 그는 그림만 만져 봐도 자신의 작품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권씨는 천경자 위작자가 더 있었다고 말했다. “몇 명 있는데 나머지는 수준이 좀 떨어지고 현모씨가 꽤 잘 그려요. 저는 좀 터치가 과감한데 현씨는 더 다듬어져서 곱다고 할까.”
   
   천경자 화백은 위작 논란 당시 작품에 대해 “나는 절대 머릿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안 그린다. 머리 위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 다르다. 작품 사인과 연도 표시도 내 것이 아니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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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춘식씨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에서 천경자 화백의 화집을 보고 있다.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청전 위작 전문가”
   
   권씨에게 1999년 당시 검찰에서 ‘천경자 위작’을 자백하게 된 이야기를 물었다. 권씨는 “담당검사가 최순용 검사였어요. 인사동에 정화 바람이 불면서 위작자들 잡아들인다고 시끄러웠어요. 조용히 살려고 제주도 내려가 있다가 잡혀 왔죠. 미인도 위작과 관련해서 자세히 진술서를 써서 검사한테 제출했는데 다음 날 다른 조사관이 들어오더니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죠. 뭐 그러다 덮여버렸죠.”
   
   당시 권씨의 진술은 모든 언론이 보도를 하면서 화제가 되긴 했다. 문제는 권씨가 그림을 그린 시기를 1984년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신빙성을 잃었다. 권씨는 “그때 정확하게 생각이 안 나기도 했고 대충 이야기한 것이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여러 번 연도가 왔다갔다 했다. 수차례 기억을 수정한 끝에 권씨가 대답한 내용이다. “천경자 위작 3점을 그린 시기는 1978년쯤이에요. 1977년 아니면 1978년 달력 그림을 보고 그린 거니까. 그 다음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미인도를 그렸어요. 1978년이나 1979년, 1980년쯤 될 거예요.”
   
   당시 담당검사로 문화재 분야를 주로 수사했던 최순용 변호사(행복마루 법률사무소)는 지난 10월 28일 서울 경운동에서 열린 고미술품 감정교육 관련 강연에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위조된 게 맞다고 본다”는 발언을 했다. 강연에서 최 변호사는 “고서화 전문 위조 혐의로 검거된 권씨가 천 화백의 그림을 자신이 그렸다고 해 반신반의하다 진술을 받았다. 눈빛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상부에 보고하자 ‘진상규명을 하라’는 쪽과 ‘공소시효 지났는데 의혹만 부풀릴 수 있다’는 의견이 갈려 결국 수사는 안 하고 진술 내용만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최 변호사의 발언으로 권씨의 주장은 힘을 얻게 된 셈이다.
   
   권씨는 청주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한다. “청주 석교초등학교, 청주중학교, 청주상고서 줄곧 미술반 활동을 했어요. 홍익대 학생미전에서 특선도 하고 그랬죠. 졸업하고 고서화 보수, 수정을 하다가 위작을 하게 됐어요. 청전 이상범 선생님 그림을 주로 했어요. 한번은 제가 그린 위작이 호암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적도 있어요. 인사동 화랑에 진품이 걸려 있어서 호암에서 결국 그림을 내렸어요. 도록에도 가짜인 내 그림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청전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그의 위작은 전문가들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권씨는 1995년 청전 그림 위작사건 때의 일이라면서 말했다. “검찰에서 감정위원들을 7~8명 불렀는데 제가 그린 위작을 보고 전부 진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산봉우리 한 개가 너무 삐죽해서 내가 그릴 때 좀 둥글고 낮게 그렸거든요. 그래서 밝혀진 적도 있었죠.”
   
   요즘도 권씨는 고서화 수정 일을 하고 있다. 40년 넘게 하다 보니 웬만한 위작은 걸러낼 수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그림 유통이 투명해져 과거처럼 위작을 그릴 수 없다고 했다. 권씨는 위작자로서 천 화백의 작품은 채색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미인도 말고 다른 것도 해볼까 했는데 힘들더라고요. 동물 있는 그림은 따라하기 어려워요. 미인도는 따라 그리다 보니까 마무리하기 전에 미완성 상태가 더 멋있는 것 같아요. 미완성 상태의 미인도에 야수파 같은 터치를 더해서 제 이름으로 작품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가 천 화백을 직접 본 것은 딱 두 번이었다고 한다.
   
   “연도는 정확히 모르겠고 동산방 화랑 전시 때였어요. 전시장에 천경자 여사가 앉아서 담배를 무니까 화랑 사장이 라이터를 턱 켜주더라고요. 그때 처음 뵀죠. 두 번째는 2002년, 출소하고 1년쯤 됐을 때죠. 인사동 길을 지나가는데 앞에 서 계시더라고요. 제가 가까이 가서 인사를 드리고 무슨 일로 나오셨냐 물었더니 액자를 수리하러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막내아들인 종우씨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서 아드님과 아는 사이라고 말했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니까 택시 타고 가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땐 건강해 보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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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1년 11월 3일자 지면에 소개된 천경자 화백의 작품 ‘막은 내리고’(1989·왼쪽)와 권춘식씨가 그린 가짜 작품.

   “내가 죄인이다.”
   
   권씨는 천 화백 위작 문제와 관련 유족과 접촉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한국화랑협회에서 자리를 만들어 인사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명함을 주면서 한번 찾아오라고 하더란다. “그 후에 기자들하고 같이 갔는데 부담스러웠는지 안 만나주더라고요. 작품만 보면 내가 그린 것은 금방 알 수 있는데….”
   
   지난 10월 25일자 국제신문은 천경자 화백의 맏딸 이혜선씨가 보낸 이메일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도 가장 먼저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소위 ‘미인도’라는 그림을 그린 바가 없음을 재확인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천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씨와 사위인 문범강씨(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도 기자회견 등을 통해 “자식의 입장에서 밝혀야 할 사건”이라면서 “관련 자료를 모아서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30일 천 화백의 ‘피붙이’ 같은 작품 93점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뒤늦은 추도식이 열렸다. 우리나라 미술사에 가장 강렬한 한 페이지를 남긴 천 화백이 가는 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권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죄인이지 뭐…. 송구하고 미안할 따름이에요. 고인의 명복을 빌고 제 마음의 짐도 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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