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죽음·삶·학문·신을 대하는 ‘의심’…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나
- 한윤정 선임기자 yjhan@kyunghyang.com
ㆍ짧은 느낌, 긴 사색
ㆍ정진홍 지음 | 당대 | 355쪽 | 1만4000원
종교학자에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종교학자라고 해도 사후의 일을 알 수는 없다. 대신 질문을 이렇게 바꿀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나요?” 저자(서울대 명예교수)는 죽음, 삶, 학문, 신 등 4부에 걸쳐 질문에 답한다.
ㆍ정진홍 지음 | 당대 | 355쪽 | 1만4000원
종교학자에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종교학자라고 해도 사후의 일을 알 수는 없다. 대신 질문을 이렇게 바꿀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나요?” 저자(서울대 명예교수)는 죽음, 삶, 학문, 신 등 4부에 걸쳐 질문에 답한다.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이냐는 문제에 대해 그가 드는 실례가 있다. 성적이 우수하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던 고등학생이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라는 문자를 남기고 갑자기 투신 자살한다. 이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오죽하면 스스로 죽었을까.” “죽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면 살아야지, 왜 죽어?” 둘 다 잘못된 태도다. 전자는 그의 죽음에 공감하는 것이지, 그의 삶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아니다. 죽음이 마땅하다고 승인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후자는 삶의 아픔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종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게 문제의 해결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승자의 도덕에 입각해 패자를 연민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죽음은 삶 이후, 즉 단절이 아니라 삶과 더불어 있는 삶의 현실이다. 그래서 죽음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듯 모른 체하거나 삶을 정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된다.
저자는 불쌍한 죽음, 불안한 죽음, 부끄러운 죽음, 경멸스러운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려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 질문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로 넘어간다. 이 역시 답은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대신 ‘도대체 왜 사느냐?’를 물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최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놓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위로하거나 “분노하라”고 훈계한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인물의 일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좋은 직업, 높은 연봉을 일방적인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보다 중요한 건 젊은이들이 삶의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주제에서는 ‘비학문적 학문에의 동경’이 눈에 띈다. 평생 읽고 쓰면서 살아온 그가 분서갱유에 빗댈 만큼 많은 책을 내다 버렸다. 나아가 ‘사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성에 대한 불가사의한 불신’까지 느꼈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을 만나는 자리에서 책이 색안경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라디오빵’(수리점)을 하는 친구가 목사의 설교를 들은 뒤 “결국 헌금하라는 이야기더군”이라고 요약하는 걸 들으면서 물신주의, 권위주의 등 종교와 성직에의 기대가 어긋난 현실을 명쾌하게 판단했다고 감탄한다.
이런 말을 곧이들을 독자는 물론 없다. 느낌과 사색, 감각과 이성의 균형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짧은 느낌, 긴 사색’이란 책 제목을 설명하는 긴 서문이 실려 있다. ‘삶에서 생각을 비롯하게 하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러나 느낌은 곧 지나갑니다. 사색이 없으면 느낌도 무의미합니다.’ 책을 버리고 학문을 의심하는 그는 이 책을 쉬운 문장, 여러 문단의 ‘짧은 느낌’(에세이)으로 썼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각자 입장에서의 ‘긴 사색’을 요구하고 있다.
저자는 불쌍한 죽음, 불안한 죽음, 부끄러운 죽음, 경멸스러운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려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 질문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로 넘어간다. 이 역시 답은 없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대신 ‘도대체 왜 사느냐?’를 물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최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놓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위로하거나 “분노하라”고 훈계한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인물의 일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좋은 직업, 높은 연봉을 일방적인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보다 중요한 건 젊은이들이 삶의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주제에서는 ‘비학문적 학문에의 동경’이 눈에 띈다. 평생 읽고 쓰면서 살아온 그가 분서갱유에 빗댈 만큼 많은 책을 내다 버렸다. 나아가 ‘사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성에 대한 불가사의한 불신’까지 느꼈다고 한다. ‘삶이라는 것을 만나는 자리에서 책이 색안경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라디오빵’(수리점)을 하는 친구가 목사의 설교를 들은 뒤 “결국 헌금하라는 이야기더군”이라고 요약하는 걸 들으면서 물신주의, 권위주의 등 종교와 성직에의 기대가 어긋난 현실을 명쾌하게 판단했다고 감탄한다.
이런 말을 곧이들을 독자는 물론 없다. 느낌과 사색, 감각과 이성의 균형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짧은 느낌, 긴 사색’이란 책 제목을 설명하는 긴 서문이 실려 있다. ‘삶에서 생각을 비롯하게 하는 것이 느낌입니다. 그러나 느낌은 곧 지나갑니다. 사색이 없으면 느낌도 무의미합니다.’ 책을 버리고 학문을 의심하는 그는 이 책을 쉬운 문장, 여러 문단의 ‘짧은 느낌’(에세이)으로 썼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각자 입장에서의 ‘긴 사색’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