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70) 회장은 자신을 장보고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였다.
김 회장이 서울 농대를 포기하고 부산수산대를 지원한 것은 어쩌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아니면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칠고 험한 바다를 꿈의 대상으로, 기업의 대상으로 삼은 기업인은 우리 사회에 드물다.”
소설가 최인호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원양어선을 타고 5대양을 주름잡던
마도로스 출신의 김 회장에 대해 건전하고 꿈이 있는 몽상가" 라고 평했다. ....
●바다와의 인연…장보고를 꿈꾸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벤처 비즈니스맨의 전형이다. 서울대 입학을 마다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좇아
바다 인생을 택했기 때문이다. 성실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개척자 정신으로 바다와 싸워 성공을 거뒀고
식품가공업과 금융부문 등으로 그룹을 키워내며 자신의 꿈을 이뤘다.
김 회장의 삶은 이처럼 바다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1935년 전남 강진 농촌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큰아들이 잘 돼야 한다는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동생들 대신 학교를 다닌 셈이다.
어린 동생들은 후에 김 회장이 학비를 대주었지만 기대와 책임감을 한몸에 안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걸어서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강진농고를 결석 없이 다니면서 우등생 자리도 놓치지 않았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3 시절. “바다는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다.
우리 젊은이들이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이끌려 망망대해로 인생의 나침반을 돌렸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계기로 그는 수산대에 진학해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서울대 농대에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골 학교에서 서울대에 들어간다면 큰 경사인데 갑자기 지방에 있는 뱃사람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또 졸업하고 나서 배를 탈 때도 장애가 많았습니다.
정식 학부 졸업생이 배를 탄 것은 제가 처음이었거든요. ( 도전정신과 개척정신 )
당시 수산대 졸업생들은 수산청이나
수산업협동조합 같은 관계기관에서 근무하거나 교사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여수수산고 교장으로 계시는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교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백면서생의 객기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결국 항해중에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겨우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참치 잘 잡는 마도로스’
1958년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원양어업을 시작한 뜻깊은 해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승선자이기도 하다.
기업가로 변신하기 전 김 회장은 8년간 실제로 마도로스 생활을 했다.
항해사로 시작한 뱃사람 생활에서 곧 능력을 인정받아 3년 만에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파격적인 승진이다. 다른 배보다 빨리 만선을 기록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때부터 국내외 원양어선 업계에서 그는 ‘참치 잘 잡는 선장’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 수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각오로 배를 탔고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출어에 나섰다.”면서 “고기떼를 찾아 바다를 헤맬 때나
조업을 앞둔 새벽이면 목욕재계를 하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강조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뒤의 일은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신조로 삼았던 마음 가짐 때문인지 승승장구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대충대충’‘괜찮아’다.
1964년 고려원양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돼 물품판매, 차관업무, 선박도입 등 수산업 관련 업무를
익혔다. 당시 원양어선이 잡은 참치는 대부분 현지에서 수출됐는데
그때 외국상선들과 거래하며 쌓은 신용은 나중에 창업할 때 큰 도움이 됐다.
1969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조업과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동원 산업을 창업했다.
당시 사업 밑천은 1000만원. 배는 일본 기업에서 공짜로 빌렸다.
일본에서 어선 구입비로 37만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담보나 정부·은행의 지불보증 없이
신용만으로 빌린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10여년간 쌓아온 신용의 결과였다.
사장이 된 뒤에도 그는 직접 배를 몰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참치 잘 잡는 선장’이라는 별명이 무색치 않게 동원산업의 원양어선은 월등한 어획고를 기록했다.
창업 2년만인 1970년 외화 획득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과 수산청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70년대 초 몰아닥친 1차 석유파동은 동원산업을 비롯해 모든 원양어선
업계에 타격을 주었다.
불황으로 도산하는 기업체가 속출하는 가운데 감원·감량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동원은 오히려 투자를 늘리는 등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일본에서 4500t급 초대형 트롤어선을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었지만 그는 바다생활을 통해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배를 타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기상정보가 정확지 않아 예보없이 폭풍우를 만나는 일도 많았지만
바람이 온다고 일일이 피해 다니다보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배를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와 싸워 이기고 났을 때처럼 감격스럽고 벅찬 희열도 없다.
폭풍우와 맞서 싸운 경험들이 인생을 성장시켰고 여물게 해준 것 같다.”
그는 해양에 관한 풍부한 경륜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85∼91년 한국수산업 회장,90∼92년 원양어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식품과 금융업으로의 확장
다른 원양회사들이 낡은 배를 가지고 ‘본전뽑기’식 조업을 하는 동안 동원은 조업을 끝낸 선박은
현지에서 매각하고 최신형 장비를 갖춘 선박을 구입하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업계 선두주자가 됐다.
30여척의 원양어선과 함께 연간 10만t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수산업체로 키운 것이다......
그는 “1981년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 코스에서 몇달 공부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통조림을 먹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럼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참치통조림을 먹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참치캔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등산로 입구에서 참치통조림 시식회를 하는 등 참치를 알리는 데 총력을 쏟았다.
출시 이후 4∼5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88올림픽과 함께 국민 식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동원은 명실공히 식품 업계 강자로 부상했다.
동원 참치캔은 국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식품업을 시작한 1982년. 김 회장은 증권업에도 뛰어들었다
. 역시 하버드대학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공부하며 들었던 얘기가 동기가 됐다.
하버드대학 MBA출신들이 어떤 분야에 주로 취업하는가를 조사해 봤더니 우수한 사람들이 증권회사나
투자은행을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라는 것이다.
그는 어선을 더 사려고 준비했던 돈으로 증권회사를 샀다.
당시 국내 증권회사의 인식이 좋지 않아 원양어선 한 척 값(80억원대)으로 중견 증권회사인 한신증권을
살 수 있었다.
.... 한신증권은 1996년 동원으로 개명했다가 지난 2004년 12월에는 한국투자증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투자금융지주로 재탄생했다......
●아들들에 밑바닥부터 경영수업
김 회장은 부인 조덕희(67) 여사와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선장시절인 1962년 당시 초등학교 동창이던 조 여사의 오빠 조영채(70)씨의 소개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조 여사의 아버지는 김 회장이 졸업한 군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낸 분으로
김 회장을 사위로 맞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장남은 김남구(42)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이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장남 김 사장은 입사하기 앞서 6개월간 남태평양과 베링해에 나가 참치배를 타며
동원을 이해하기 위한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면서 “하루 16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그물을 던지고
참치를 잡는 한편 참치를 삶고 냉동시키는 과정에서부터 갑판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김 회장의 차남인 김남정(32) 경영지원실장(직급 차장) 역시
1997년 경남 창원 참치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시작, 동원산업 영업부 평사원으로 시내
백화점에 참치제품을 배달하는 등 밑바닥부터 배웠다. ....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뛰어난 문장가’ 김재철 회장
“재웅아! 우리는 드디어 만선(滿船)을 했다. 우리 배는 지금 어창(魚倉)마다 고기를 가득 싣고 사모아로
돌아가는 길이다.
푸른 하늘엔 흰 구름 떠가고 바다엔 새하얀 우리 배가 물결을 가르면서 달린다.
물위에 떼를 지어 놀던 고기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한가로이 물에 떠 있던 고래도 배를 피해 점잖게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엊그제까지도 바다는 성난 파도로 꿈틀거렸는데 오늘은 우리의 만선귀항을 축하라도 하는 듯 잔잔하구나.”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린 김재철 회장의 ‘남태평양에서’의 한 구절이다. 김 회장은 책을 많이 읽는 독서광으로 유명하지만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간결하고 생동감 있는 글을 많이 썼다.
이밖에 ‘바다의 보고’,“거센 파도를 헤치고’ 등 그의 글은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소설가 정비석씨는 ‘사상계(思想界)’에 발표한 김 회장의 글을 보고 “이 정도 글 솜씨라면 작가로 데뷔해도 좋겠다.”고 평했다.
김 회장 스스로도 기업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문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서로는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가 있다.
그는 원양어선 선장시절 선용품을 사기 위해 시모노세키 등의 항구에 기항하면 책방에 가서 헌책들을 무게로 달아 구입해
배 안에서 끊임없이 읽었다.
덕분에 김 회장은 문학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만큼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다.
지난 2004년 일본 미쓰비시 그룹 회장·사장단으로 구성된 모임인 ‘금요회’에서 ‘나의 인생과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주제로 일본어 특강을 했다.
요즘도 월 평균 10∼20권의 책을 읽는다.
경제·경영·역사·심리 등 분야가 다양하다. 회계학도 독학으로 배워 재무제표도 꼼꼼히 본다.
직원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동원산업 사내 게시판에는 책 요약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jhj@seoul.co.kr
■ 동원출신 CEO들 ‘반짝반짝’
김재철 회장은 소식·금연·절주 등 절제된 생활로 유명하지만 인재 욕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좋은 인재 = 좋은 실적’이란 생각에서 1980년대 후반 증권업계 최초로 성과급제를 도입했고
금융권 최초로 스톡옵션제를 실시했다.
동원이 인수한 한신증권은 90년대 한번에 특별성과급을 400%씩 지급, 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참치를 많이 잡으면 선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듯 선장을 지낸 그의 삶에 성과주의가
깊이 배어있는 것이다 ( 보상할줄 아는 사람만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동원증권 출신들 중에는 스타급 인사가 많다. 동원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CEO(최고경영인)는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대신증권에서 김 회장에게 한신증권으로 스카우트된 그는 1998년 동원증권 사장
재직 당시 금융권 최초로 1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주택은행장으로 영전돼 권리 행사는 하지 못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즐겁게 일한 뒤 행복하게 헤어진 모범 케이스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동원이 놓아주지 않으려 애를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 마흔이 되면 창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이사 재직 시절인 서른 아홉이 되던 해에 동원증권을 나왔다.
그를 놓아줬다는 이유로 화가 난 김 회장이 김 전 행장과 무려 6개월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일화는
아직도 금융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김 전 행장은 한신증권 이사로 일하면서 박 회장을 동원에 영입했다.
두 사람은 절친한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다.
재경부 공무원 출신의 정태석 광주은행장(전 동원증권 상무), 장인환 KTB 자산운용 사장(전 동원증권 차장),
송상종 피데스 투자자문 사장(전 한신증권 대리), 조승현 전 교보증권 사장(전 동원창업투자 사장)도 모두
한때 동원증권에 적을 뒀다.......
=> 안철수에게 휘몰아치는 풍랑의 진원지는 안철수를 강적으로 생각하는
새누리와 친노친문의 정치꾼들입니다
새누리와 친노친문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정치꾼의 이익 보다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새정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안철수에게 새누리의 지지자는 빨갱이라고 말하고,
친노친문의 지지자는 온갖 나쁜 말로 문지릅니다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딱지를 붙인 것입니다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한 사람들과 그 지역에 대하여 그러했던 것처럼 .....
전쟁에서 강한 장수에게 화살을 퍼붓듯이 두 진영의 안철수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안철수가 정치꾼들에게 가장 강한 적이며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에게는 가장 좋은 정치인이라는 것을 반증한다고 봅니다
바다에 풍랑이 자주 있다는 것을 알지만 도전과 개척 정신으로 대양으로 나아간
김재철 회장님의 젊은 시절이 오늘의 성취감을 안겨준 것처럼
안철수 의원님도 정치에서 반대파는 항상 비난하고 발목 잡기를 자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성찰의 시간을 거친 후 강한 철수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약한 물살은 옛길을 따라 흐르고 강한 물살이 새길을 만듭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배는 저항력을 압도하는 추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전진이 가능합니다
수고한 사람에게 보상이 있다면 보상 받은 본인은 물론
옆에서 보는 사람도 더 열심히 하겠지요 ?
작은 일은 혼자라도 이룰 수 있지만,
큰 일은 주변에 좋은 인재가 모여야 협업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님이 동원참치 김재철 회장님처럼
지금의 풍랑을 잘 헤치고 나가서 웃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