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을 보면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국내외정세를 떠올린 사람들이 아주 많을 줄 안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오늘의 대한민국

영화 ‘명량’은 1700만의 관객을 동원한 명작이다. 국민이 이 영화에 열광하게 만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이 보여준 뭉클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명량에서 대승한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결국 순국하고 마는데 거기에는 조선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명의 장수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에 광양만에서 순천 왜교성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퇴각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일본군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무고하게 침략해서 백성을 도륙한 원수를 순순히 돌려보낼 수가 없다며 그들의 퇴로를 막은 것이었다. 고니시는 다급한 나머지 명의 육군 도독 유정과 수군 제독 진린에게 이순신이 수로 차단하는 것을 말려달라며 뇌물을 쓴다.
유정과 진린은 고니시의 퇴로를 열어주라고 이순신 장군에게 강요한다. 조선군의 작전권을 갖고 있다고 하나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 일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피력한다. 그러나 명의 두 장수는 막무가내였고 진린은 급기야 고니시의 연락선 한 척이 경상도 쪽으로 갈 수 있도록 포위망을 풀어준다. 그 연락선은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왜교성에서 이순신 장군에 의해 수로가 차단되어 곤경에 빠진 것을 알리고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결국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고니시 군을 구원하려고 오게 되었고 이때 이 함대를 요격한 전투가 노량해전이며 결국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서 순국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승리한 후 노량에서 순국할 때까지 이순신은 조선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상관인 명군의 지휘부의 군림 때문에 고뇌하며 괴로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초기에 일본군을 막지 못한 조선은 명군 지휘부에 군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군은 1593년 1월, 벽제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에 일본군과의 강화협상에 매달린다. 명군은 ‘일본군을 허가 없이 공격하지 말라’고 강요했고 이 명령을 어긴 조선의 장수는 잡아다가 처벌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부가 발행한 통행증을 소지한 일본군들이 조선인 마을을 지나가더라도 조선군은 이들을 저지할 수 없는 개탄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명군이 일본군을 비호하는 상황에도 조선 조정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그저 명군 지휘부에 일본과의 협상은 불가하니 빨리 그들을 쫒아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 벽제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크게 다쳤던 명군은 일본군과 싸우려면 너희 조선이 직접 싸우라며 조롱하였다. 일본군의 침략의 피해를 가장 크게 당한 조선은 전쟁의 작전권은 강대국인 명에 넘겨주고 주권이 없이 관객으로 전락하고만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는 전략요충지이며 반면에 우리는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미약한 약국이기에 비롯된 것이다.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그랬고 6,25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우리의 비극이다. 그런데 왜 이런 비극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막강한 파워를 가진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라의 리더들은 국내외 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고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며 대응해야 한다. 임진왜란 무렵 조선의 리더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것을 알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무단히 노력한 리더였다. 이 때 조선은 로얄 외척들이 권력을 주물렀고 척신정치가 난무했으며 아첨 떠는 소인배로 인한 인사의 난맥과 수탈이 기승부리는 가운데 민초들의 신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척신정치 때 집권했던 사림(士林)들 역시 치열한 정쟁에 휘몰리며 조선의 기운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런 오합지졸과 같은 상황에 나라 밖에서 일어나던 분위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리더들은 이에 대해 대비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 ‘명량’에 열광하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리더들은 우리 주변의 강대국의 변화에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 매년 경제적 호황으로 힘을 축적하고 있는 중국의 자신감, 아시아의 급변 상황에서 영향력이 약화되지나 않을까 고심하는 미국의 조바심, 지진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불안감으로 군사적 힘을 장전하고 침략 본능을 다시 일깨우려는 일본의 초조함이 수면위로 올라오는 동아시아의 기운은 다시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사건’을 통해 보이듯이 대한민국 리더들의 무능함과 무책임은 조선시대의 리더들과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순식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국가적 위기에 대한 대비는 과연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음까지 불사한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구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왜 이리 가슴에 사무치듯 그리울까!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이순신은 과연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나타났는데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지휘봉을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에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있는 것일까? 막연하게 어디에선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고 때가 되면 거북선을 만들어 짜~잔 하고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이 마음은 필자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