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완구 재생에 문재인은 책임 없나 되돌아봐야 이완구가 국회에서 총리로 인준되었다. 이완구 인준을 놓고 네티즌을 비롯한 국민들은 정치인들과 언론이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인준이 되면 정치권은 자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회 주변에서는 새정치연합이 투표에 참가할 것이고, 이완구는 인준될 것이라며 국민과 상반된 얘기들이 돌았다. 국민들은 이완구의 삶을 보면서 도덕적해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래서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존엄성을 상실하게 한 것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정치권의 용납 묵인하는 태도를 보자 앞으로 경찰과 검찰은 범인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잡으면 이완구를 핑계를 댈 것이라는 야유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대중정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사실 정의보다는 지역감정과 이해관계 등을 더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표를 얻어 다음 선거에서의 당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의와 상식보다는 다음 선거를 위해 역 방향으로 국민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쇼를 부려 이완구 인준이라는 욕심대로의 결과를 만들었다. 국민들도 정치인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는 예측하였다. 이제 예측된 것 중 남은 것은 정치권 자멸이다. 교만과 욕심으로 자멸의 길을 간 것이다. 스스로 분열과 갈등 속으로 들어갈 것이고, 국민들의 외면이 더해질 것이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만들어 가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면 정치인들이 멘붕할 정도로의 심판이 있다. 박근혜는와 새누리는 이완구 인준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자멸의 마지막 벽돌을 한 장 더 쌓은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범죄나 도덕적해이에 대해 처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선거를 통해 위임을 받았다고 해서 임기 중에는 정의와 상식을 팽개치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까지 위임한 것은 아니다. 언론은 이완구 표결 결과를 새누리는 실리를 새정치연합은 명분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언론 스스로는 이완구에게 처절하게 짓밟혀 기레기로 전락되었지만 이런 것에 무대응 무반응 한 대가는 엄청 클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5명이 있었다면 오늘 이완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당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정치적 셈법의 결과로 행동한 것이지만 네티즌들은 새누리의 2중대임을 확실히 확인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최소한 새정치연합과 행동통일을 하든지 아니면 새정치연합의 이중성을 철저히 분쇄하면서 당명처럼 정의를 명분으로 이끌든지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5명이 있었다면 국민과 국회가 박근혜에게 이렇게 유린당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이 멘붕으로 자포자기로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완구 인준의 결과는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5명을 쫓아낸 결과의 과실로 보여 진다. 국민들은 불량완구를 재생시켜준 문재인에게 그 책임이 크다고 비판한다. 야당이 뭉쳐서 불법과 부정과 비상식에 저항했으면 불량완구가 재생되는 이런 반 역사는 있을 수 없었다는 평이다. 문재인이 대표가 되자마자 반역사와 불의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새누리당 2중대 대표라는 비판에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기회를 주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이미 죽은 가지다. 문재인은 야당 대표로서 제2민주화운동을 부르짖고 있는 국민들에게 비수를 꽂은 것과 같다는 평이다. 부정선거와 불법권력에 대해 법대로 진실만을 가지고 새롭게 거듭나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지지자들은 박근혜 심판에 앞서 문재인 퇴출에 나설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종북몰이로 이념대결을 일으키며 공안탄압이 가해지자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진실이 아닌 거짓 위장된 이중 생각을 가져야 하니 정신착란 환자가 된 것이다. 정의와 상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구분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 국민들이 정신병환자가 아닌 정의와 불의,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하며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대변해 주어야 할 야당을 상실한 국민들은 정의와 상식의 목소리에 갈급해 있다. 피해자들이 생존을 위해 가해자의 생각을 추종하면서 피해자끼리 탄압하는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되고 있다. 죄의식이 실종되어 피해자끼리 투쟁하는 일들이 정당화되는 풍토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비극이다.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나오며 정의는 죽지 않으며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역사정의다.
<출처 : 뉴스300 http://www.news300.kr/sub_read.html?uid=4009§ion=sc27§ion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