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프라이머리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최 기자. 당원, 대의원들이 국회의원 후보 뽑으면 난 죽기 전날까지 해먹을 수 있어.”
글 | 최병묵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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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어느날 정치권의 후배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형님, 부탁 좀 하나 들어주세요. 우리 경선하는데, 선거인단이 필요하거든요. 형님하고 형수님하고 이름 넣을게요.” “그래, 오랜만이네. 근데, 어~~~. 선거인단?(잠시 고민) 그래, 고생하는구먼. 이름하고 주소 문자로 찍어줄게.” “감사합니다, 형님.” “열심히 하라고.”
얼마 뒤 저는 정동영, 손학규 후보가 적혀 있는 투표용지에서 한 사람을 기표했습니다. 누굴 찍었는지 밝히지 않는 건 두 분 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 그 후배한테 물어보니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선거인단 모집 때문이죠. ‘국민참여경선’이란 것의 구조가 원래 그렇습니다. 모든 유권자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반 여론조사와는 완전 다릅니다. 국민경선은 참여 희망자가 등록을 하고 투표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후보자가 이 과정에 개입해선 안 됩니다. 우리 정치 현실은 그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 게임인데, 최대한 많은 ‘등록 희망자’를 동원(動員)해야 합니다. 후보자 캠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수를 동원하느냐가 곧 능력이 됩니다. 물론 이런 실적이 승패의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사활(死活)을 걸고 동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과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에도 총선 때 일부 지역구에 가면 차량 편으로 유권자를 실어 나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에는 투표 당일 선거운동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의 현장에선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불 안 가리기식 동원이 횡행할 수밖에
2011년 11월의 일입니다. 무소속인 우근민(禹瑾敏) 제주도지사가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합니다. 2012년 6월 지방선거를 반년쯤 앞둔 시점이었죠. 한나라당으로선 경쟁력을 갖춘 현직(現職) 도지사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셔와야 할 형편이죠. 문제는 그와 함께 입당한 1만7000여 명의 당원들이었습니다. 대체로 우 지사 지지자들입니다. 6개월쯤 뒤엔 도지사 후보 경선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당시 경선룰은 당심(대의원+당원)과 민심(국민선거인단+여론조사)을 반반씩 반영했습니다. 우 지사는 원래 관료 출신으로 지방자치 선거 실시 전에도 관선(官選) 제주도지사를 했습니다. 잠시 새정치국민회의, 열린우리당 당적을 가진 적이 있지만, 뿌리는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 민주자유당, 민정당입니다.
제주도지부를 새누리당은 취약지역으로 분류합니다. 당시 전체 당원이 3만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우 지사 지지자 1만7000여 명이 입당한 상태에서 그대로 지사 경선을 치렀다면 우 지사가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되는 건 떼어놓은 당상이었을 것입니다. 중앙당으로서는 우 지사가 여러 약점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교체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원이 아니라, 일반 유권자 사이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원희룡(元喜龍) 전 의원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돌연 룰(rule)을 바꿉니다. ‘100% 여론조사 경선’으로요. 말이 룰 변경이지, 원희룡 전 의원에게 공천을 주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탄생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기 부산시장 경선에선 권철현(權哲賢) 전 의원이 ‘제주도식’을 원했지만 거부당합니다.
기성 정치인 기득권만 보호한다는 또 다른 약점
대통합민주신당이 한 방식은 사실상 오픈 프라이머리입니다. 새누리당 제주지사 경선은 오픈 프라이머리를 가미한 방식으로 하려다 중앙당 속셈과 맞지 않으니까 룰을 바꾼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든 이 두 사례는 바로 오픈 프라이머리가 갖고 있는 치명적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경선에 참여하겠다고 등록하는 사람을 ‘동원’하는 문제입니다. 투표 결과를 ‘조작’해 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나마 대선 후보의 경우처럼 전국 단위 경선이라면 조작의 정도가 심각하지 않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경선은 다릅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유권자가 20만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절반 정도는 다른 당 지지자이니 역선택(逆選擇) 우려 때문에 빼야 할 겁니다. 10만명 중에서 정말 자발적인 등록만 받는다면 얼마나 모일까요.
원래 특정 정당 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유권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 1만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몇천 명만 동원해도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평소 조직을 관리해 온 당협위원장·지역위원장들이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던 분이 있는데 평소 700명 정도의 조직원을 관리했습니다. 1인당 10명씩만 모집해도 7000명입니다.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했다면 이분은 70이 훨씬 넘은 지금도 국회의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픈 프라이머리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부산 출신으로 국회의장을 지낸 분인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최 기자. 당원, 대의원들이 국회의원 후보 뽑으면 난 죽기 전날까지 해먹을 수 있어.” 정치 신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국회의원에게 불만 많다. 바꾸는 게 좋다”고 했던 유권자들도 경선 때는 ‘또 그 사람’을 찍는 게 현실입니다.
오픈 프라이머리 유사 상품인 여론조사 경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당내 경선 때의 대리투표 행위, 착신전환 방식을 이용한 여론조사 조작 행위 등은 이제 고전이 됐습니다. 어떤 듣도 보도 못한 조작 행위가 벌어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차라리 ‘실세 낙하산’이 함량미달 정치인 기득권 보호보다 나아
실제 여론조사 경선의 패자(敗者) 측은 대부분 진정으로 승복하지 않습니다.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문제 제기를 공식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친한 사람을 만나 보면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나름의 몇 가지 그럴듯한 근거를 댑니다. 2002년 노무현(盧武鉉) 후보와 단일화 여론조사를 했다가 진 정몽준(鄭夢準) 전 의원 측, 2007년 이명박(李明博) 후보에게 진 박근혜(朴槿惠) 후보 측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4·29 재·보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관악을 경선에서 패한 김희철 후보 역시 여론조사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는 그야말로 참고자료로만 써야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질문 내용, 방식, 시기는 물론이고, 전화 상담원의 성향 등 영향을 미칠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공식적으로 오차 범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국갤럽 등 신뢰성 높은 여론조사 기관은 그래서 ‘후보 결정 여론조사’ 일을 여간해선 맡지 않습니다. 저도 여론조사 경선은 믿지 않는 편입니다.
어찌 됐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픈 프라이머리의 ‘강력한 명분’을 무시하긴 어렵습니다. ‘공천권을 국민의 손에’라는 쉽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구호를 누를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종의 선동적 용어인 셈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시위 때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구호가 기억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오픈 프라이머리의 치명적 약점을 설명합니다. 그럼 당신은 무슨 대안을 갖고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많은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현재와 같은 공천 제도가 더 낫다고 봅니다. 당내외 인사로 공천 심사위를 구성하는 것 말입니다. ‘권력 실세들의 자기 사람 심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폐해가 ‘함량미달 정치인’에게 다시 배지를 달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했다면 노무현(盧武鉉) 이회창(李會昌) 같은 분들의 정치 입문(入門)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