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창밖으로 펼쳐진 늦가을의 교정 풍경에 취해 본다. 그러나 졸업이 가까운 학생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 깊어가는 것은 가을만이 아니다. ‘취업 시름’도 계절 따라 깊어만 간다. 학생들이 취업에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지난해 이맘때 한 일간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올해 상반기 취업준비를 시작한 **대 국사학과 4학년 박모씨(26)는 서류 전형에서만 10번이나 탈락했다. 인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교지와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던 박씨는 누구보다 대학생활에 자부심이 컸다. 토익 점수도 945점이었다.” (경향신문 2014년 10월 21일. 문전박대 취업, 사라지는 전공, 철폐되는 학과, 문사철 길을 잃다).
영어 실력과 부전공 및 동아리 이력 등을 빼고 나면 나는 20여 년 전의 박 군이었으리라. 그때 교수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되려 하기보다 전일하게 공부할 생각을 먼저 하게나.” 지금껏 그 말씀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나는 지금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응용인문학과 역량중심 교육모델의 한계
지난 학기 한 학생이 제출한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학문이 가치를 지니고자 하려면, 첫째로 전공자의 삶에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제공해야 하고, 두 번째는 가시적 성과물을 통해 존재 유무를 증명해야 하며, 세 번째는 학문의 성과물이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 환원이 빈번해야 한다.” 학생의 절박한 외침을 듣는 일은 때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과연 나는 이 학생이 말하는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고 있기는 한 걸까?
지난 2004년경이었다. 취업 중심, 실용 지향 쪽으로 대학 사학과 전공 교육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학계 내부에서 처음 공론화되었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인문콘텐츠학회가 창립되었고,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역사학의 활용 가능성을 탐색하는 연구들이 이어졌다. 연계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인접 학문 분야와 일부 과목을 묶어 교육하는가 하면, 아예 이름을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는 경우도 생겨났다. 지금은 어떤가? 교육부는 대학에 역량 중심 교육모델을 제시하면서 취업친화형 교육을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교육부 사업에 참여하여 재정지원을 받으려는 대학 입장에서도 이 모델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응용인문학’적인 시도들은 지금 실제로 성과를 거두고 있기는 한 걸까? 박군의 사례를 보도한 신문은 같은 날짜 지면에서 그런 노력들이 역사학도의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잘 보여주었다. 기업이 요구하는 융복합적 인재는 ‘응용인문학과 실용적 역량으로 단련된 사학도’가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공계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구나 인간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그런 ‘응용인문학’, 그런 교육모델이라면 더 이상 인문학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취업난은 역사학도와 인문대생을 넘어 문과계열 학생 전체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것일까?
1990년대 이후 대학의 사학과 교육과정에 새롭게 등장하거나 강화된 과목들이 있다. 기록학, 서지학, 고문서학, 박물관학, 문화재학, 북한사, 여성사, 생활사, 문화사,역사지리학, 도시사, 지방사, 지역사 등이 그런 것들이다. 과목은 다양해졌지만, 교육과정의 전체 틀에서 보면 역시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지식중심 교육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연구자 육성’ 운운하는 것이 한가해 보일 정도로 우리의 현실이 엄중하다면, 더구나 표준화된 지식을 ‘네이버’와 ‘구글’이 가르쳐주는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과목의 다양성보다는 교육의 틀거리 자체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는 어떤 시대이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지식 중심 교육모델에서 익숙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일 뿐, 결코 최대치는 아니다. 그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이제라도 문제 중심 교육모델을 만들어내고, 인문학적 기초 체력을 강화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식 중심에서 문제 중심 교육모델로
왜 지식중심이 아니라 문제 중심이어야 할까? 문제 중심이라면 현상에 작용하는 힘들과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도덕적·선험적·결과적·당위적 평가를 넘어 성찰하고, 그 과정을 통해 현실을 관통하는 질문의 힘을, 나아가 통찰력을 길러낼 수 있다. ‘과거는 어떤 시대인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도 있다. 한국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20세기 사학사를 대폭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모든 역사지식을 가능한 한 현재의 장소정보 위에서 논의하고 정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역사를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서면 융복합의 외부적 압력을 ‘전유’하거나, 현재를 다루는 다른 학문 분야와 소통해 나갈 수도 있다.
역사학이 인문학의 일부라는 당연한 사실을 의식하면서 인문학적 기초역량을 강화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 학생들이 중급 정도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논문 작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역사 글쓰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2015년 가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 문제가 역사교육의 일부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라건대, 우리 사회가 국민교육과 시민교육, 시민교육과 인문교육의 층위를 염두에 두면서 전체 역사교육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날이 올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때 역사학도와 인문대 학생들의 취업난은 또 어찌 될 것인가? 그때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다시 무슨 말을 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