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과학기술자와 국회의원 선거 / 윤태웅
선거철만 되면 선거공학이나 정치공학이란 말이 많이 들립니다. 계략이나 술책의 의미로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이 주로 사용하지요. 저 같은 공학자에겐 좀 불편한 표현입니다. 정치공학이 정치에 공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거라면,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적의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뜻이겠지요. 정치적 술수를 정치공학이라 일컫는 관행은 공학기술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청년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19대 총선 직전인 2011년 12월 ‘대한민국 과학기술 대연합’(대과연)이라는 단체가 생겨납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전국자연대학장협의회, 한국공과대학장협의회, 한국IT전문가협회 등 주요 과학기술단체가 총망라된 연합체입니다. 대과연은 2012년 4·11 총선과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과학기술인 국회 진출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입니다. 전국의 이공계 교수들에게 지속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서명을 요청하였는데, 2012년엔 무려 1028명이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대과연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나 일자리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를 실현하려면, 과학기술 전문가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 기술혁신과 합리적인 과학기술정책이 가능하고, 과학적 합리성이 꽃필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언문은 과학기술 전문가를 더 많이 공천하라는 ‘강력한 촉구’로 마무리됩니다.
과학적 합리성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데는 저도 공감합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왔습니다. 과학기술을 잘 아는 국회의원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과연의 선언문은 논리가 너무도 약하고 어설펐습니다. 깊은 고민의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장의 근거가 충분했다면 강력히 촉구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논리가 약하면 말이 세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적 합리성은 어떻게 꽃피우고,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는 또 어떻게 실현한다는 건지요?
이공계 기피가 여전한 문제인지도 의문입니다. 이공계 박사는 급증했지만,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동아사이언스> 변지민 기자에 따르면, 기초과학 분야의 20~30대 과학자는 대부분 비정규직이며, 1~3년 재계약을 해야 하는 저임금 단기 계약직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합니다.(<과학동아> 2016년 5월호) 능력이 엇비슷한 박사급 과학자 중에선 운 좋은 소수만 대학에 자리잡고, 나머지는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구조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더 많은 학생이 이공계로 가야만 하는지요? 청년 과학기술인의 현실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요?
일자리 부족의 해법과 기술혁신의 관계도 의문입니다. 대형 제조업이 무너지고 전문직 일자리까지 위협받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대과연은 어떤 기술혁신을 말하려 했을까요? 선언문에는 엄밀한 상황 인식도, 합당한 근거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비과학적인 글이었습니다. 형식의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최소한의 논리적 구조는 갖춰야 했습니다. 대과연은 자신의 선언이 이익단체의 응석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기성 과학기술인의 이러한 한계가 어쩌면 정치공학이 정치적 술수가 돼버린 언어적 현실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싶습니다.
청년 과학기술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 연구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들의 아픔을 한국 과학기술의 구조적 문제로 이해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리하지 못하는 이공계 인사라면, 국회로 보내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아직까지 국민들을 '미개인' 으로 보며, 속이는 아주 못된 표현 입니다.